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시다 시게루 (문단 편집) === 총리 시절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www.weblio.jp/souri45.jpg|width=100%]]}}} || || 45대 총리 취임 후 || ||{{{#!wiki style="margin:-5px -10px" [navertv(31567992)]}}}|| ||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12부 - 쇼와(昭和) 격동의 총리들中'''[* 2019년 3월 9일 방송][* 쇼와(昭和) 격동의 시대, 목숨을 걸고 일본의 방향타를 잡은 총리들의 고난과 갈등의 이야기를 영상 매체 발명 후 기록된 영상들을 수집하여 대표적인 4명의 총리를 통해서 바라본 다큐멘터리] || 1946년에 발족된 그의 첫 내각인 [[제1차 요시다 내각]]은 [[노조]]의 잇따른 [[파업]]으로 상당히 무능력한 내각으로 존재했다. 연합군에 이리 저리 끌려다니다가 맞은 1947년 총선에서 그가 속한 자유당이 제2당으로 내려앉으면서 결국 사퇴했다. [[일본어 위키백과|일본 위키]]에서는 이에 대해서 그가 '헌정의 상도', 그러니까 총리는 다수당에서 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켰다고 추켜세운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시다 히토시]]와 별로 매끄럽지 못한 관계가 보수연립을 무산시킨데다 자유당의 애매한 의석 수로 얼마 가지 못할 정권을 유지시키느니 요시다는 차라리 사퇴하고 기회를 노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으리라 봄 직하다. 그리고 그 판단은 확실하게 들어 맞았다. 이후 [[가타야마 내각]] 때는 [[와신상담]]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민주당의 [[아시다 내각]]이 집권하자 지속적인 태클과 클레임을 걸어서 아시다 히토시의 민주당에서 나온 탈당파들과 다시 합당을 하면서 민주자유당으로 다시 집권하는 데 성공했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moon-water.org/Shigeru_Yoshida_1947.jpg|width=100%]]}}}|| || 1947년, 현역 시절 || 1948년 다시 집권하자마자 의원 수 불리기의 목적으로 [[의회 해산|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치른 결과, 이전 다수당이었던 일본사회당과 민주당[* [[일본사회당]]은 이미 가타야마 퇴진 직전 열린 총선거에서 완전히 쪽박크리를 먹은 상태였다. 게다가 당내에서 좌우파로 분열되어 결국 1950년에 사회당 우파들이 대거 탈당하면서 [[듣보잡]] 신세로 전락했다. 아시다의 민주당은 아시다 퇴진 이후 별일없이 비틀거리다가 하토야마 이치로에 의해 자민당으로 흡수되었다.]을 완전히 격파, 절대적인 과반수를 차지하며 권력을 무난히 획득했다. 당시 요시다는 GHQ민정국과 사사건건 충돌하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유권자들에게는 GHQ에게도 당당한 '애국자 요시다'로 받아들여졌고 선거 압승의 원동력이 되었다.[* 비슷하게 독일의 [[콘라트 아데나워]] 또한 점령군 측과 마찰을 빚다 쾰른 시장에서 잘렸는데, 오히려 독일 국민들에게 당당한 정치가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사례가 있다.] 특히 이때 요시다가 발탁한 관료, 경제인, 정치신인들이 대거 당선되면서 요시다파가 일거에 몸집을 불렸고 이러한 세력을 바탕으로 이후 일본의 재건 과정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과시했고, 그가 발탁한 관료들은 훗날 총리가 되었다.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등이 이때 활약한 그의 수족들. 전후 일본에서는 패전 후 군대를 가질 수 없게 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두고서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요시다는 일본의 패전국 위치와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평화헌법을 앞장서서 주장하였다. 반대로 하토야마는 평화헌법 개정과 이를 통한 재무장을 주장하고 나섰다. 하토야마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요시다는 최소한의 방위력만 보유한 채 미국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는 정책을 썼다. 그렇게 일본과 미국은 1951년에 [[미일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는 '''미일동맹의 근간'''이되었다. 또한 그는 경제성장에 주력하지 않을 경우 빈곤과 가난이 심각해져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이 강해지리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요시다의 국가전략 노선을 기반으로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은채 경제성장을 이루며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요시다의 총리 시절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1953년, 이케다 하야토 당시 대장대신이 유명한 망언을 했으니 바로 "망할 기업은 망해야 하고, 돈이 없으면 보리를 먹어야 한다."라는 말이었다. 다만 실제로 야당 의원과의 질의응답 과정에서 나온 발언은 알려진 바와는 상당부분 달라서 '부실한 기업은 속히 청산해서 다른 기업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서민들이 보리를 먹게 되더라도 경제기조를 바꿔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런데 신문들이 거두 절미하고 큰 제목으로 써갈기는 바람에... 어쨌거나 이케다에 대한 불신임결의가 중의원에서 통과되면서 위기에 휩싸였다. 거기다기 의회 질의응답 과정에서 야당 의원인 [[니시무라 에이이치]]와 언쟁 중 '''[[바보|바카야로]]'''라고 혼잣말로 욕을 했는데[* 본인보다 19살이나 어린 니시무라가 본인을 강하게 밀어붙이니 [[변질된 유교적 전통|칠순이 넘은 노인인 요시다가 격분]]한 것.], 이게 하필 '''마이크에 잡혔고''', 당연히 화가 난 니시무라가 항의하며 소동이 커졌다.[* 결국 요시다는 바카야로 사건이 터진 그 날 바로 사과해야 했고, 사과를 받은 니시무라는 이에 대해 더 추궁하지 않았다.] 이 발언 때문에 요시다는 징벌위원회에 회부되었고, [[하토야마 이치로]] 계파 의원 30여명이 이탈해 11표 차로 '''[[내각불신임결의]]가 가결'''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어쩔 수 없이 1953년 3월 14일 의회 해산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바카야로 해산이다.] 이 외에도 여러 악재가 겹쳐 지지도가 곤두박질쳤으나,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 전쟁]]으로 반등했다. [[쇼와 덴노]]는 [[쇼와 덴노/전쟁 책임|본인의 전쟁책임]]을 인정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으나, [[태평양 전쟁]] 자체에 대해 반성하기는 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기념 행사의 발언에서 쇼와 덴노가 "나는 아무래도 반성이라는 글자를 넣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군도, 정부도, 국민도 모두가 하극상이나 군부의 전횡을 놓친 것을 반성해 나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을 넣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요시다 총리가 아래와 같은 말을 하며 반대했다. >(천황이) 전쟁을 시작하신 책임이 있다는 말을 들을 위험이 있다. 이제 전쟁이라든가, 패전이라든가 하는 말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戦争を御始めになつた責任があるといはれる危険がある. 今日は最早戦争とか敗戦とかいふ事はいつて頂きたくない気がする. [[https://www.yna.co.kr/view/AKR20190819021551073|#]] [[https://www3.nhk.or.jp/news/html/20190816/k10012038471000.html?utm_int=detail_contents_news-related_00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